2-1_산상수훈_복이 있는 사람
예수님의 산상수훈에서 제일 먼저 말씀하신것은 복있는 사람에 대해서 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마5:3~12
심령이 가난한자
심령이 가난한자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할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자각하는 사람 입니다. 하나님은
저는 저의 능력과 힘을 의지했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가난할때 가장 필요한것이 무엇인지,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드러납니다.
사람은 가진게 많아지면서 점점 복잡해지고, 중요한 것을 놓치고 살아가게 됩니다.
여러분 핸드폰으로 어느정도 까지 기능을 사용하고 계십니까? 그 고가의 핸드폰의 기능들을 전부 사용하시나요?
현재 핸드폰은 인공위성을 해킹할수 있는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학교다닐때 배웠던 슈퍼컴퓨터 여러대의 성능보다 좋다고 합니다.
핸드폰만 그럴까요? 자동차는 어떻습니까? 집은 어떻습니까?
풍족함과 부유함은 불필요함을 많이 만들어 본질을 흐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의 심령도 마찬가지 입니다.
심령의 가난함이 없으면 불필요한 마음들, 불만들이 자리를 잡게 됩니다. 자아, 교만, 탐욕, 분노,시기 이런 마음 들입니다.
이런 마음들을 가득 품고 예수님을 쫓아갈수 있을까요?
심령이 가난한자는 내가 의지할 곳이 주님밖에 없는, 나의 죄가 낱낱이 드러나 부끄러워 숨고싶고 의지할 곳은 하나님 밖에 없는 그런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만 의지하고 품을때 예수님은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애통한자
애통한자는 소중한 것을 잃어 버린자와 같은 마음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거나, 소중한 것을 잃었을때 그 애통한 마음을 가진자는 복을 받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애통은 어디서 오는 애통을 말씀하시는 걸까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자신을 바라보면서 오는 애통, 이 세상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뜻과 다른 방향으로 가는 모습을 보고 오는 애통 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되고, 나자신의 삶이 지금까지 그렇지 못했다는 것을 깨닳을때 오는 그 마음. 하나님께 너무 죄송하고, 감사하고, 형언할 길이 없어서 눈물만 줄줄 흐르는 그런 애통.
예수님은 애통하는 자가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온유한자
온유한자는 땅을 차지 할 것이라.
온유한 사람은 자신을 하나님의 종으로 볼 뿐,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으로 생각지 않는 사람입니다. 온유한 사람이 된다는 건, 최대한 각광을 받기 위해 자기 모습을 꾸미려고 계속 애쓰는 대신, 자신의 단점과 한계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온유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모세와 예수님이 계십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민수기 12:3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태복음 11:29
성경의 온유(πραυs:프라우스)의 헬라어의 사전적 의미를 보면, 온유,겸손,친절한 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본문에 사용된 프라우스의 어원은 아나브(עָנָו)라는 히브리어에서 나왔다. 아나브는 가난한, 고통받는 이라는 의미 입니다.
우리의 상식에서 온유한 자는, 착하고, 화내지 않고, 순한 사람 이라고 생각이 들지만
성경의 맥락에서 살펴볼때, 온유의 성격은 고통과 압제를 당하나 직접 보복하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을 신뢰하는 성향으로 볼수 있다.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할 것이라는 얘기는 시편에서도 언급이 됩니다.
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시편 37:1~11
본문의 말씀으로 유추되는 온유의 성품은,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고, 불평하지 않고 그 분(화)을 그치고 여호와를 기대하는자 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성경에서 의로움이란 헬라어로 디카이오쉬네(δικαιοσύν)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조건’, 좁은 의미에서 ‘각자에게 책임으로 주어진 정의와 도덕’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로마서 6장 6~7
로마서 본문을 통해 우리는 의롭다는 것이, 죄에게 종노릇 하지아니하는것, 죄어서 벗어나는것을 통해 의롭다 하심을 얻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의로운 행위를 하는것을 의롭다 하신것이 아니라,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힘으로서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을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참고 옥한음목사님 설교
긍휼히 여기는 자
우리의 생각에 긍휼은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는것. 배푸는것 정도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긍휼은 그 이상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긍휼의 마음을 여인이 젖먹는 자식에 대한 마음으로 비유하셨습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찌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이사야 49:15
글휼은 불쌍한 마음이 아닌, 사랑의 마음입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과 같은 그런 마음을 긍휼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린도전서 13:3
사도바울은 사랑이 없는 구제는 아무 유익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부모가 아이들에게 용돈을 주거나, 옷을 사줄때 그마음이 어떨까요?
그 마음이 자녀들이 불쌍해서 옷을 사주고, 용돈을 주고, 학비를 내주나요?
그렇치 않습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더주지 못해서 베풀어주는 사랑인 것입니다. 모든 잘못을 용서하고 덮어주는 용서 그것이 긍휼의 마음입니다.
구제 활동은 긍휼의 마음에서 비롯되는 행위인 것이다.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남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스스로 만족하고자 하는 선행이 아닌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랑과 안타까움으로 참여하는 구제만이 하나님이 인정하는 구제인 것이다.
또한 긍휼의 마음은 용서의 마음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세기2:17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말씀하셨지만, 하나님은 인류의 구원의 계획을 세우셨다. 이 죽음을 면치 못할 죄로부터 다시 구원을 허락하신 그 마음. 그마음은 사랑하기 때문에 용서하는 마음이다.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를 인간의 몸으로 이땅에 보내시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그 보혈로 우리를 구원하신 그역사.
그것이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인 것이다.
마음이 청결한자
내가 내 마음을 정하게 하였다 내 죄를 깨끗하게 하였다 할 자가 누구뇨
한결 같지 않은 저울 추와 말은 다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느니라
비록 아이라도 그 동작으로 자기의 품행의 청결하며 정직한 여부를 나타내느니라
듣는 귀와 보는 눈은 다 여호와의 지으신 것이니라
잠언 20:9~13
잠언 말씀에서,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품행의 청결과 정직의 여부를 나타낸다고 말하고 있다.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
디모데후서 2:22
하나님은 마음이 청결하고, 품행의 청결 하고 정직하며 정욕을 피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을 만나주신다고 하십니다.
화평케 하는자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찌어다
시편 34:14
내가 악인의 큰 세력을 본즉 그 본토에 선 푸른 나무의 무성함 같으나
사람이 지날 때에 저가 없어졌으니 내가 찾아도 발견치 못하였도다
완전한 사람을 살피고 정직한 자를 볼찌어다 화평한 자의 결국은 평안이로다
시편 37:37
말씀을 통해 화평케 한다는 의미가 악의 반대되는 내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평화가 아닌 말씀을 가지고
악을 등 지고 이루어 내는 화평임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우리가 악한 자리에서, 악한 사람들과 평화롭게 지낸다는 의미가 아님을 명확히 해야 합니다.
안인들의 자리에서, 그들에게 동조해 가며 평화를 추구하는 것은 우리가 말씀으로 화평케 한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
본문 말씀중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가장 설명이 잘 되어 있습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세상의 자리에서 예수님의 말씀의 기준으로 살아갈때 부딪침이 반드시 발생합니다.
세상사람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과 말씀이 옳다고 하시는 것이 너무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너무 맞는 소리를 하기에 눈에 가시처럼 보이고 흠집을 내고 싶어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핍박을 받은 자에게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구조와 시스템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시스템과 많이 다르다는 것을 인지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일평생을 부딪침과 껄끄러움을 감수하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크리스천의 삶에 이 부딪침이 없다면 삶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신앙을 이제 배워가는 사람들에게도 이 부딫침을 미리 알려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러셨던것 처럼 말입니다.
작은 부딪침은 학교부터 시작됩니다.
친구들과의 관계속에서, 선생님과의 관계속에서 부딪침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성장해 나가면서 부딪침은 점점 커지고 잦아집니다.
직장에 들어가면 상사의 말에 따라야 합니다.
요즘은 많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그래도 직장안에서 신앙의 부딪침은 계속됩니다.
이런 부딪침은 싱앙생활을 하는 크리스천들 사이에서도 나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 마땅한데, 내가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기에 그렇게 사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사람들도 았습니다. 이 교회 안에서요.
온갖 꼬투리를 잡고 헐뜻기에 안달이 납니다.
예수님은 이런 자리에서 핍밥을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무 속상하고 답답하겠지만 하나님은 그 마음을 하나님께 두고 이겨내시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팔복에 대한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훈련시키기전, 예수님을 따를 때 얻어야 하는 골(Goal) 을 명확히 알려 주십니다.
우리가 아는 단어의 개념으로 팔복을 해석하는 것이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을때 비로서 복의 자리에 들어갈수 있습니다.
2_산상수훈_예수님의 첫 번째 가르침
지난 경험을 통해서 저는 수업의 첫번째 시간이 얼마나 중요 한지 알고 있습니다. 첫번째 시간에는 전체의 일정과 그 일정을 통한 목적을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첫번째 시간을 놓치게 되면,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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